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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잔다르크” 페트라 켈리(1) - 독일 녹색당의 건설자

작성자
hanalaw03
작성일
2019-02-06 19:17
조회
206

푸른 잔다르크페트라 켈리(1) - 독일 녹색당의 건설자

 

 

서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기성 체제에 대한 전면적 전복을 꿈꾼 신좌파의 사상은 1968년에 베트남 전쟁 반대, 서유럽에 미국의 핵미사일 배치 반대 등 평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으로 그 꽃을 피웠다.

68운동이 숙지는 국면이었던 1970년대 중반에는 서독을 중심으로 생태운동, 반핵운동이 솟아오른다.

1975년 독일의 환경수도라고 우리에게 알려진 프라이부르그 옆 빌(Wyhl) 지역에 핵발전소(원전)를 짓는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독일의 시민사회 운동은 반핵의 깃발로 뭉쳤다. 1976년 브록도로프, 1977년 칼카르 원전 반대투쟁은 68때와 비슷한 정도로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더불어 운동만이 아니라 정치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었다. “68혁명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루디 두취케(Rudi Duchke)제도권을 향한 대장정을 주장하며 기존 정당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당의 건설을 주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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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방의회에서 시위를 하는 페트라 ; 녹색당의 최대 무기인 반전운동을 의회 내에서 펼치고 있는 페트라. 미국의 니카라과 침공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페트라 켈리, 독일인의 피를 타고 있으나 미국에서 성장하여 녹색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고, 젊은 나이에 연인과 함께 비극적 죽음을 맞아 녹색잔다르크로 영원히 남게 된 그녀.

페트라 켈리는 1940년생 두취케보다 조금 늦은 1947년 바이에른 주의 퀸즈부르그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페트라의 본디 성은 아버지 리하르트 레만으로부터 물려받은 레만이었다. 약간 무책임한 낭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페트라가 어린 시절 일찍 집을 떠났고, 젊은 여성으로 가계를 책임졌던 어머니를 대신하여 페트라를 돌본 사람은 할머니, 즉 어머니의 어머니였다. 페트라의 엄마는 2차 대전 종전 후 서독에 주둔하였던 미군 장교 켈리와 재혼을 하였고, 페트라는 의붓아버지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다. 페트라의 여동생으로 어린 시절 암 투병을 하다가 죽은 여동생 그레이스는 페트라로 하여금 삶과 죽음, 생명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게 만들었고, 유명한 영화배우로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와 이름을 같이 한다. 서양에서 같은 성의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은데, 미국에서 켈리라는 성은 제법 흔한 모양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켈리로는 이 글의 주인공 페트라 켈리,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그리고 베트남 양민학살의 아픈 기억으로 있는 미라이 학살의 가해자 측 지휘자 켈리 중위가 있다.

 

페트라는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여 학업 성적도 뛰어났고, 학생회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사회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교내 신문에 글을 썼고, 만화가로서 재능을 뽐냈으며, 학교 미식축구 팀 치어리더로도 나섰으며, 탁월한 웅변 실력으로 외국인으로서 드물게 올해 최고의 웅변가상을 받기도 했다. 원래 숫기가 없고 소심하던 성격이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활기차고 강인한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66년 페트라는 워싱턴의 아메리칸 대학에 입학하여 국제정치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입학 전 그녀는 우리 세대는 달라.’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세기 숱한 전쟁을 일으킨 모든 세력들

그러나 아무리 극성스런 악의 세력도

사랑의 힘만은 꺾을 수 없어

그 놀라운 힘 우리 안에서

66학번 우리 친구들의 힘이 되어

세상 밝히는 빛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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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쉴리와 페트라 켈리 ; 오토 쉴리는 적군파를 변론한 인권변호사로 강한 혈실주의 경향을 가졌다. 이후 녹색당을 탈당하여 사민당으로 복귀한다.]

 

간디나 헨리 소로우 같은 이들의 영향을 받고, 케네디 형제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사건을 겪으면서 켈리는 비폭력을 신념으로 간직하게 된다. 이후 녹색당 강령에 비폭력이 핵심 주제로 들어가게 된 것은 특히 페트라의 경험과 그 시기에 형성된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트라는 케네디 대통령을 지지하였고, 로버트 케네디에게는 직접 편지를 보내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장학금 지급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여 실제 도움을 받은 인연을 만들었다. 유력한 인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인연을 맺는 것은 페트라가 이후에도 사용한 자신의 독특한 문제해결과 인간관계 형성의 방법이었다. 동생 그레이스를 위하여 교황에게 편지를 썼고, 교황 집전미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생 그레이스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페트라는 녹색당을 창당하던 해에 카톨릭을 떠났다. 교황을 만난 후 체코로 가서 프라하의 봄이 좌절된 체코의 처참한 상황도 지켜보았다. 주요 인권운동가들의 피살, 베트남 전쟁, 꺾인 프라하의 봄, 이런 것들이 그녀에게 비폭력, 평화의 세계관을 가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학부를 졸업한 페트라는 네덜란드 암스텔담 대학에서 유럽통합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브뤼셀에 있는 유럽공동체의 임시직을 거쳐 그 산하 경제사회위원회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 유럽공동체에 근무를 하면서 근엄한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장성들을 만나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수많은 지구인들은 놓아두고 유럽공동체가 과잉생산된 과일 수백만 톤을 폐기하는 결정을 보면서 혁명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남성 일색의 유럽공동체 주요 인력 구성을 보면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페트라는 능력과 자신감을 두루 갖춘 여성으로 여성이라는 존재가 장애가 된다는 인식이 없었으나, 유럽공동체에서 생활은 성불평등과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을 깊게 만들었다. 녹색당의 정책에서 여성주의가 차지하는 비중과 깊은 문제의식, 당 운영에 있어서 다른 정당과 현저히 다른 넓고 깊은 여성 참여라는 특징은 페트라의 이 당시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녹색당을 만들 때 여와 남이 구조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당을 설계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녹색당의 운영체계가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문제에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브뤼셀에서 직업생활을 시작하던 1972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페트라는 동서독 관계 정상화를 이끈 레지스탕스 출신의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유대인 묘역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 주저없이 사민당 입당원서를 썼다고 한다. 당시 페트라의 사상은 평화, 비폭력, 여성주의로 구성되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경과한 후 미국의 환경운동가인 랠프 네이더가 주최한 워싱턴의 한 행사에 참가한 후 페트라는 녹색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 행사에서 방사능이 암을 발생시킨다는 것, 원전이 폭발할 수 있고 폭발하게 되면 히로시마 수십배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듣게 된다. 그날 이후 페트라는 자신의 신념에 반핵을 추가하게 된다.

그 무렵부터 페트라는 휴가와 무급휴직을 최대한 활용하여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75년 빌 핵발전소 건립 반대운동은 페트라가 본격적으로 반핵운동, 환경운동에 뛰어든 장이 되었다. 사민당 정부가 원전 건설을 강행하면서 인근지역 농민들 사이의 대립을 조장하는 모습까지 보면서 페트라는 존경하는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이 기민당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호주를 방문해서는 6만여명이 누워서 원전건설 반대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전투적 저항운동에 익숙한 독일과 다른 비폭력 운동을 알게 된다.

68운동이 마무리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독일에는 다양한 시민운동 조직이 생겨난다. 환경과 생태를 지키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다양한 단체들이 환경보호 시민운동 전국연합(BBU : Bundesverband Bürgerinitiativen Umweltschutz. 이하 환경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연합체를 구성하였다. 페트라는 1977년 환경운동연합(BBU)의 상임위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70년대 독일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전기와 에너지 수요가 크게 늘면서 정부는 원전 건설을 에너지 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환경연합을 중심으로 한 환경운동은 반핵운동에 주요역량을 쏟아 부었다. 68운동이 사그라 들면서 갈길을 잘 찾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반핵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다.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비일 원전 투쟁은 이후 북서부 노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칼카르원전 반대투쟁으로 이어진다. 칼카르 투쟁에는 이웃의 네덜란드, 벨기에 환경단체들도 함께 한다.

녹색당의 출현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유럽공동체의 유럽의회 선거였다. 공동체는 이후 유럽 의회 구성을 위해 각국이 직접 선거를 하겠다고 밝혔다. 각국의 다양한 정당들은 서로 이념이 비슷한 정당끼리 국경을 넘어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사민당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환경, 시민단체들은 사민당에 대한 비판적지지 혹은 독자 선거운동이라는 두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된다. 1978년 환경연합 전국대회는 이 두가지 노선이 충돌하는 자리였다. 두 노선의 대립에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페트라의 제언에 힘입은 바 크다. 그녀는 정당 건설이 아니라 선거참여 여부를 중심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한다. 의회에 운동의 거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로서 운동과 의회활동이라는 두 날개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또다른 정치연합(SPV)”였다. 독일 녹색당의 전신이고 환경운동과 평화운동 진영의 주류는 이 단체를 통해 유럽의회 선거에 뛰어들었다. 1979년 여름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다른정치연합3.2%라는 상당한 득표율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의회 진출은 실패하였지만 녹색당 창당의 큰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1980년 독일 헌법재판소가 있는 칼스루에라는 작은 국경도시에서 녹색당이 창립된다. 창당대회에서 페트라는 당대표단의 일원이 된다. 그해 녹색당은 브레멘주와 바덴주 선거에서 5% 장벽을 뚫는데 성공하여 주 의회에 당당히 진출한다. 그러나 그해 시행된 전국 총선에서 불리한 선거구도의 탓도 있었으나 녹색당은 1.5%를 얻어서 기세가 꺾이게 된다. 개인적으로 페트라는 의회에 진출하면서 생업으로서 유럽공동체 일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크게 실망하였다고 한다.

1981년 서독정부가 소련의 미사일 전진배치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독에 ()미사일을 배치하도록 하는 나토 결의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반전평화운동 진영은 서독의 재무장에 반대하는 크레펠트 호소에 적극 참여한다. 이 모임에서 페트라는 소련의 미사일 전진배치도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수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북한 핵무기와 관련하여 민주노동당에서 비슷한 흐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무렵 25살 연상의 게르트 바스티안과 사랑을 하게 된다. 그 이전에도 기혼이었던 아일랜드 노동운동가 존 캐럴과 연인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바스티안과는 반핵, 반전운동의 큰 분수령이었던 크레펠트 회의에서 급속히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 바스티안과 같이 미국을 방문하여 각 도시를 돌면서 핵전력의 균형을 통한 전쟁 억제 정책을 비판하였다. 헬뮤트 슈미트 사민당 정부가 미국 핵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려는 것을 강력히 비판한다. 페트라와 바스티안은 함께 주목을 받았다.

4개 주의 의회 선거가 치러진 1982년 페트라는 매주 브뤼셀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로 가서 선거운동을 하는 생활을 하였다. 68혁명의 본거지였던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가진 헤센주에서 68혁명의 아이콘이었던 요쉬카 피셔를 중심으로 한 녹색당은 8%의 지지를 얻었다.

 

페트라는 당의 결의에 따라 보수의 아성으로 알려진 자신의 고향 바이에른 주에 출마를 하였으나 예상대로 낙선을 하였다. 낙선 후 페트라는 빌리 브란트 사민당 대표에게 편지를 보내 나토 재무장에 동의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 편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아 원외정당 녹색당이 사민당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1월 전당대회 하루 전에 독일 국영방송에서 페트라의 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그해 12월 스톡홀름에서 대안 노벨상을 받으면서 켈리는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다. 반면 당내에서 페트라의 언론 활동을 개인주의적 성향의 노출로 강력히 비판하는 흐름이 있었으나 페트라는 녹색당 연방의회 의원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녹색당은 기성정당의 엄숙하고 관행적인 선거운동과 달리 이미지 광고와 문화행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선거운동 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켈리는 핵무기 보유국들을 피고로 하는 국제형사재판 법정을 전범재판의 도시 뉴른베르크에서 개최하였다. 서독정부도 피고로 기소되었던 이 모의 법정은 나토의 유지는 찬성하지만 미국 미사일 배치를 반대하는 다수 서독인들에게 녹색당을 주목하게 하는 훌륭한 이벤트였다. 녹색당은 이 선거에서 5% 봉쇄조항을 넘은 득표를 하여 페트라를 포함하여 27명의 의원을 배출하였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기적 같은 성과였다. 19833월 켈리는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바스티안도 후순위로 바이에른 주 녹색당 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바스티안은 연방의원이 된 후 몇 달만에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체계적이지 못한 녹색당에 질려 탈당을 한다. 켈리에게는 평화공존 운동을 계속하면서 영원히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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