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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잔다르크” 페트라 켈리 (2) - 독일녹색당의 어머니

작성자
hanalaw03
작성일
2019-02-08 19:58
조회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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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 켈리는 연방의원이 된 뒤에도 거침이 없었다.

 

독일통일에도 켈리가 남긴 발자취가 있다. 19835월 서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핵무기 철폐 총회에 참석한 페트라는 칼을 녹여 보습을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 면담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호네커는 핵무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동독을 방문해 달라고 켈리에게 서신을 보내왔고, 켈리는 그해 10월 동베를린을 방문한다. 녹색당 참가자들은 호네커와 면담을 통해 동서독 사이 무력사용금지, 적대행위 금지를 담은 선언문을 채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켈리는 이 방문에서 베르벨 볼라이 게르트 포페와 울리케 포페 부부 , 페라 볼렌베르거 등 동독의 반체제 성향 인사들을 만난다. 울리케 포페와 볼렌베르거는 통일 후 치른 최초의 연방선거인 1990년 선거에서 동맹 90” 소속으로 당선된다. 볼라이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동독시민의 대표적 조직인 노이에스 포럼의 창립을 주도한다. 이날 만남 이후 페트라는 이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한다.

 

켈리는 1984년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티벳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였다. 모두 미국, 중국 등과 외교에 부담을 주는 행동이 될 수 있었다.

 

켈리는 1984년 가을 인생에 큰 어려움을 가져온 결정을 하게 된다. 창당 당시 자신이 강력히 주장하여 도입하였던 의원순환제에 따라 2년 임기 이후 사퇴를 해야 하는데 이를 거부하고 의원직 사퇴를 하지 않겠다고 밝힌 편지를 동료의원들에게 보낸 것이다. 다른 의원들은 모두 사퇴한 상황에서 켈리가 버티자 당원들의 비난이 집중되었다. 켈리의 의회활동과 당활동도 약화되었다. 그러던 중 1986년 체르노빌 사건이 터진다. 녹색당과 켈리는 다시 움직인다.

녹색당은 체르노빌 사건으로 핵의 위험성과 인류의 안전에 눈을 돌린 서독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1987년 총선에서 켈리를 포함하여 더 많은 의원을 연방의회에 보냈다. 그러나 이후 당내 노선 갈등과 미숙한 당 운영으로 여러 차례 시련을 겪었고, 그 와중에서 페트라도 원칙주의적 태도로 동료들과 멀어졌다. 켈리는 반정당의 정당이라는 기치를 고수하며 대중운동과 원내 투쟁의 두 날개를 고수하였지만, 당내의 원칙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노선 투쟁에서는 한발 비켜나 있었다. 이러한 태도가 양측 모두로 비판을 받았다. 켈리는 헤센주에서 적록 연정을 추진해 나가는 피셔의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타협을 통한 20% 지지보다는 원칙을 지키며 8%의 지지를 얻는 것이 낫다.” 현실주의자들은 나토해체하는 당강령을 벗어나 나토 개혁이라는 목소리를 내며 적록연정을 구축을 위한 노선변화를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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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녹색당이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맞이한 통일연방 첫 선거에서 녹색당은 봉쇄조항을 넘지 못하고 다시 원외 정당이 된다. 구 동독지역에 대한 선거전략이 부재한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그 선거에서 당을 장악한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원칙주의자들은 비례대표 후보에서 상당수가 탈락을 한다. 요쉬카 피셔를 중심으로 한 현실주의자들은 중도파와 연합하여 선거에서 원칙주의자들을 체계적으로 배제시켜 나갔다. 원외정당이 된 상태에서 녹색당은 더욱 현실주의자들의 무대가 되어갔다. 켈리는 당시 상황에 낙담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세력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얌전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인지 증거를 보여주려고 기를 쓰는 정당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한탄을 한다.

녹색당은 원내 진출 8년 만에 다시 원외로 내쫓겼고, 페트라 역시 의원직을 포함해서 당내 모든 직위를 잃었다. 녹색당의 원내 정당 지위 상실은 선거전략의 실패에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구동독 지역에 대한 전략 부재가 큰 원인이었다.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아메리카 인디언, 티베트 문제 등에 집중했다. 활동의 근거지를 잃은 페트라는 연인 바스티안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921019일 바스티안이 살던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101일이 사망일로 추정되었다. 연락이 안되어 걱정을 하던 바스티안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는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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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여러 증거와 정황을 종합해서 동반자살로 발표했다. 바스티안이 잠든 켈리를 먼저 쏘고 자신도 그 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켈리는 잠들기 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팩스를 확인하고 원고를 점검했으며, 바스티안은 죽기 직전에 켈리의 친구 일로 자신의 변호사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녹색당은 켈리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켈리는 19921026일 바이에른 주의 아름다운 도시 뷔르츠부르그에 묻혔다. 묘비에는 녹색당의 동지이자 그녀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할 만한 시인 하인리리 뵐의 시구가 새겨졌다.

내 무덤가에 걸음을 멈추고 울지 말아요. 나는 이곳에 있지도 않으며, 잠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1998년 선거에서 녹색당은 6.7%의 득표율로 제3당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사민당과 연정 수립에 성공한다. 불가능으로 보였던 페트라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페트라의 녹색 이상의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하는 사건이었다. 1992년 이후 녹색당의 형제 재단인 하인리히 뵐 재단은 인권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계의 활동가들에게 페트라 켈리 평화상을 제정하여 그녀의 뜻을 기렸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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