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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한 적색 사상가에서 스스로를 바꾼 혁명적 녹색활동가 루돌프 바로(Rudolf Bahro) (1)

작성자
hanalaw03
작성일
2019-02-10 00:08
조회
42

붉은빛과 푸른빛의 만남

 

- 인간의 얼굴을 한 적색 사상가에서 스스로를 바꾼 혁명적 녹색활동가 루돌프 바로(Rudolf Bahr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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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2,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고 독일 68혁명의 전설 루디 두취케가 68년 저격을 당한 후 육체와 정신의 병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난다. 두취케는 제도권을 향하 대장정이라는 유명한 말로 녹색당의 창당을 주창하고 후원한다. 19793월 녹색당의 맹아인 또다른정치연합”(SPV)이 탄생하고, 그해 치른 유럽의회 선거에서 3.2%를 얻어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취케의 죽음은 녹새당의 건설을 재촉하는 신호로 독일인들에게 받아들여진다. 19801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에 걸쳐 칼스루에에서 녹색당 창당대회가 열린다. 칼스루에는 프랑스와 국경지대에 있는 숲과 녹지로 덮인 작은 도시이고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창당 직후 치러지는 총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과 연합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집권 사민당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녹색당의 약진을 보고 견제를 시작한다. “녹색당에 투표하는 것은 기민당의 집권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코리아의 사람들도 오랫동안 많이 들어온 익숙한 이야기이다. 퍼싱 2 핵미사일의 배치를 핵심으로 하는 서독 재무장 정책이 밝혀지자 서독 국민들 사이에서 반재무장 여론은 급격히 높아졌다. 2기갑 사령관 게르트 바스티안이 국방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고 사령관직을 그만둔다. 재무장 반대운동이 번지는 가운데 바스티안이 중심이 되어 쓴 서독정부에 보내는 크레펠트 호소문이 발표되고 재무장 반대운동에 500만명이 서명을 한다. 그해 가을에는 수도 본에서 30만명이 참가하는 재무장 반대 평화행진이 열렸다.

 

독일 녹색당은 페트라 켈리가 주창한 반정당의 정당을 기치로 내건다. “정당을 지향하지 않는 정당은 제도정치에 참가는 하지만 의회정치에 국한되지 않고 대중의 투쟁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의회정치를 핵심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비판적이라는 것이 반정당의 정당 이념의 중요한 부분이다. 비례대표 의원의 임기를 공식 임기의 절반인 2년으로 나누어 순환시키는 순환임기제”, 당직과 의원직 등 공직의 겸임을 금지하는 당직공직 겸임 금지를 실천하는 것도 기성의 정당운영 원리를 거부하는 반정당의 정당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각종 대의기구에 여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도록 한 여성 과반수 할당제는 전업주부들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정치 진출을 이끄는 주요한 장치가 되었고, 연방 의원들이 급여 중 노동자 평균임금을 넘는 금액을 생태기금으로 내놓도록 한 것도 파격이었다. 한국의 민주노동당이 초기에 이러한 내용을 본받았고, 보수정당까지 비례대표 선거에서 1번부터 홀수로 여성을 공천하는 것이 굳어진 한국정치에 미친 독일 녹색당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힘차게 출발한 독일녹색당에게 닥친 시련은 외부의 요인이 아니라 당의 갈 길을 두고 벌어진 내부 논쟁이었다. 국회의원들 집단이 당 의사결정의 전담자라 할 수 있는 기성정당과 달리 의원단의 재량을 크게 제한하고 당 공식지도부의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녹색당에서, 현실 의회정치의 흐름에 대처하기 위하여 의원단의 재량을 요구하는 의원단 및 그들을 지지하는 현실주의자 그룹과 녹색당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원칙주의자 그룹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고 심각한 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연방의회가 성폭력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성폭력의 최소형량을 정하는 문제를 두고 당 지도부가 최저형량을 2년으로 결정하여 통보하였으나, 의원단이 사민당과 협상을 하면서 1년으로 합의를 해 주게 된다. 당지도부와 당원들 사이에 의원단을 향한 격한 비판이 쏟아졌고, 원칙주의자 당원들이 신문에 녹색당 의원들은 더 이상 녹색당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광고를 싣기에까지 이른다.

 

1982년에 이르러 녹색당은 25천명을 넘는 당원을 가지게 된다. 1982년 선거에서 녹색당은 자민당을 추월하지만 의회 진출에 필요한 5%는 넘지 못한다. 그런데 녹색당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자민당이 연립정부를 이탈하면서 19833월에 조기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8211월의 노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하겐에서 열린 당대회, 83년 진델핑엔에서 열린 경제정책 당대회에서 원칙주의자들과 현실주의자들은 격렬하게 논쟁을 한다. 논쟁의 초점은 사회민주당과의 공조를 하는 것에 대한 찬반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현실주의자들도 연립정부 참여를 주장하지는 못하였고, 정책 연대를 의미하는 공조와 연정은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사민당과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진델핑엔 당대회는 이틀에 걸친 논쟁 끝에 성장 위주의 근시안적 사고와 단절하자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선거강령을 확정하였다.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원칙주의자들이 판정승을 한 것이다.

 

당시 현실주의자그룹을 이끌고 있던 지도자가 요쉬카 피셔였다면 원칙주의자 그룹의 사상적 지도자는 동독 태생의 루돌프 바로였다. 바로는 동독 지역 태생으로 분단 이후 독일 노동계급과 정당의 관계라는 주제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동독 공산당의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원래 레닌, 스탈린의 추종자였으나 1956년 흐루시쵸프의 연설을 들은 이후 견해를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해 일어난 폴란드 봉기와 헝가리 혁명을 지켜보면서 동독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적 견해를 갖게 되었고, 그 무렵부터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바로는 1959년 러시아어 교사인 Gundula Lambke 와 결혼을 하고 아들과 딸을 가지게 된다. “우리들의 대학이라는 신문의 편집주간과 노동조합 상담역으로 일을 하다가 자유독일 청년(Freie Deutsche Jugend (FDJ))이라는 단체에서 일을 하다가 출간한 책이 문제가 되어 그 단체에서 해고된다. 이후 1967년과 1977년 사이에 가죽과 플라스틱 제조업체 경영부문에서 일을 한다. 산업체에서 일을 하면서 그는 동독 경제가 위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원인이 관료적 경영과 노동자들의 결정권 부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취지를 당 기구에 알렸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68년 프라하 봉기는 그에게 큰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 침공 이후 그는 사상적으로 사회주의 통일당과 완전히 결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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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 작성한 원고 동유럽에서의 대안(the Alternative in East Europe)”은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정리하면서 기존의 교조적 맑시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밝힌 것인데, 1975년 출간을 하려 하였으나 당국의 개입으로 출판이 무산된다. 출간이 무산된 그의 원고는 서독의 한 출판사가 제안을 하여 서독에서 출판을 하게 된다. 바로는 나중에 그의 책이 오그스트 비트포겔의 견해와 칼 맑스의 초기 이론들에 주로 근거한 것이었다고 밝힌다.

197782일 서독 주간지 쉬피겔이 바로와 인터뷰를 한 다음날 동독 정부는 그를 체포한다. 서독 국영 1, 2 방송이 바로의 인터뷰를 방송하였고, 9월초부터 시작된 대안판매는 서점 배포가 되기 전에 미리 1쇄가 매진되는 기록을 하였다. 서독 학계의 주목과 찬사가 쏟아졌다. 신좌파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어 내었던 프랑프푸르트 학파 거두 허버트 마르쿠제는 맑스주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저작으로 평가하였고, 트로츠키파 맑스주의 경제학자 어니스트 만델은 바로를 혁명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반면 68혁명의 아이콘 루디 두츠케는 정통 레닌주의 입장에서 바로의 책을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혹평을 한다. 1978. 6. 30. 바로는 국가반역죄 등의 명목으로 8년형을 선고받는다. 당시의 변호인이 이후 통일 직전 동독의 시민혁명의 지도자이고 이후 집권 민주사회당의 수반이 되는 그레고어 기지이다. 1978.11. 19. 루돌프 바로 석방을 위한 위원회가 서베를린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8천여명이 참가한다. 바로 1979. 10. 11. 동독 창건 30주년에 바로는 사면이 되고 얼마 후 추방되는 형식으로 서독으로 이주(망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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