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삼의 ‘풀빛 만남’ (2)

<단 하루라도 살고 싶었던 세상이 녹색당에>
용접노동자,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다 

20160216-숨통이트인다 칼라

 

김진숙 선생님. 나에게 그는 ‘선생님’이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김진숙을 만났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나도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추도사로 김진숙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삶이 조금 달라졌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농본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노동’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3년 가을, 교실에서 김주익 열사 추도사를 아이들과 함께 보던 순간부터 나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답이 있든 없든, 노동의 손을 잡고 싸워야 할 이유’를 깨달았던 것이다.

김진숙 선생과의 짧은 인연을 더듬어보았다. 2003년 이후 나는 주기적으로 김진숙의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 국어교사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진행하는 청소년 인문학 모임에 그를 초대했다.

아이들은 대번 그의 팬이 되었다. 대학에 보내는 자기소개서에 ‘눈치도 없이’(?) 씌어진 글들, “김진숙 선생님을 만나고, 노동 문제를 알게 되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앞으로 어쩌고” 운운하는 대목을 고쳐 주며 미소짓던 기억이 떠올랐다.

2011년 1월 6일, 김진숙은 한진 자본의 정리해고에 맞서 김주익이 죽어서 내려온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온 나라를 뒤집어놓으며 309일을 버텼고, ‘희망버스’를 불러들였고, 끝내 승리했고, 살아서 내려왔다.

지난 19대 총선이 끝나고 난 얼마 뒤, 김진숙은 자신은 녹색당에 투표했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은 0.48% 득표로 낙심해 있던 녹색당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 때도 그랬고, 그는 여러 방식으로 녹색당을 도왔다. 노동운동 내에서의 그의 위상과 상징성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20대 총선을 코앞에 두고 다시 김진숙 선생에게 연락했다. 흔쾌히 약속을 잡아주었다. 그는 스스로를 “녹색당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와 인터뷰를 앞두고 이틀 동안 <소금꽃나무>를 다시 읽었다. 여러 군데서 목이 메었다.

20160216-이계삼 교사시절 회상

 

열 여덟, 가출해서 부산으로 온 강화 소녀 김진숙. 신문 배달, 버스 안내양, 우유 배달, 샴푸 세제 외판원을 했다. 언제나, 하루 종일 걸었다고 했다. 한겨울에도 연탄불을 못 피운 방에서 ‘이불 하나로 한 자락은 깔고 한 자락은 덮어가면서’ 3년을 살았다고 했다. 커피 한 잔 값, 새우깡 한 봉지 값이 아까워 만나는 친구 하나 없이 20대를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소 용접사가 되었다. 40kg나 되는 용접 홀더를 매고,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백척간두에 서서, 뇌수가 라면발처럼 흩어져 나뒹구는 주검을 지켜보며, 용접 불똥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지덕지 막아가며 그는 ‘공부’라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다른 삶으로 넘어가고자 했다. 그 열망을 안고 찾아간 야학에서 김진숙은 뜻밖에도 전태일을 만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같이 뒹굴며 그러나 끝내 내가 되지 못하고, 내가 그들이 되지도 못한 채 흘러갔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뒹구는, 아무데서나 오줌 누고 욕을 달아야만 말이 되는 이 아저씨들…. 세상을 새로 보게 되었다.

그 이후의 삶은 알려진 대로다. 24년동안 모리배들의 소굴이었던 어용노조를 바꾸는 일에서부터 대공분실 세 번, 부서 이동 두 번, 5년의 용접사 생활과 30년 해고자 생활.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35년을 그는 ‘이러고’ 살고 있다.

그에게 김주익을 물었다. 그는 김주익의 죽음 이후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못한다고 했다. “비겁하고 무력했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혼자 있으면 울었고, 모이면 술을 마시고 급하게 취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시간을 김진숙은 어떻게 건너왔을까.

“그 부채감들을 다 내려놓지는 못하겠지만”이라고 그는 운을 뗐다. 부채감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났다는 이야기로 나는 알아들었다.

제가 위에 있을 때 (김주익 열사가 버텼던) 129일 지나면서는 시시각각이 초조했고, 200일 넘어가면서부터는 불안해했대요. 내가 밥을 못 먹으면 조합원들도 밥을 못 먹고, 내가 잠을 못자면 자기네들도 잠을 못 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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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를 끌어내릴 생각을 했대요. 아주 구체적인 것까지 준비를 했나 봐요. 근데, 황이라 동지(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크레인 농성 당시 식사와 수발을 맡아한 분)가 반대를 한 거야. 지도위원님을 그렇게 끌어내리면 내려와서 죽는다고.

그리고, 309일 만에 땅을 딛자마자 제가 한 얘기는 이거였어요. “저는 주익 씨하고 같이 내려온 겁니다”라고.

그렇게 해서 한진 노동자들은 현장으로 복귀했다. 김진숙은 ‘주익씨’로부터 조금은 풀려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이후를 지켜보고 있다. 더 길고 오래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복귀해 보니, 이전의 삶은 아닌 거예요. 사람도 변하고 공장도 변하고. 공장의 담이 높아졌고, 카드 찍고 들어가는 수용소가 된 거죠. 일상의 삶을 누리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배신감과 상처가 남으니깐. 회장, 사장, 노무이사들에 대한 분노만 아니라, 먼저 복귀한 이들, 민주노조를 탈퇴하고 복수노조로 넘어간 조합원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힘들어합니다.

‘점마가 나를 버리고 떠났다.’ 그렇다고 사표를 쓰고 다시 나갈 수도 없지 않나. 노조도 둘로 갈라져 있고. 방법이 없으니까. 지켜보고 있는 거죠.

조선업종 전체가 위기상황이다, 뭐 이러면서 구조조정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한진은 십수년 계속 구조조정만 해왔어요. 2011년도 정리해고 투쟁이 부각돼서 그렇지 이전부터 그런 게 꾸준히 있어 왔거든요.

일을 해도 불안한 거예요. 쌍용차 같은 경우도 지금 이제 현장에 18명이 복귀해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도 또한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부담감들은 또 얼마나 클까.

오늘날 노동운동에 대한 문제의식도 드러낸다.

대기업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편재되면서 많이 달라져버렸죠. 대출로 마련한 거긴 하지만, 집도 생기고, 차도 생기고.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가보면 애들이 고등학생, 대학생 이렇단 말이에요. 이 사람들은 이 직장을 잃으면 안 돼요. 회사에서 학자금이 나오잖아요. 아파트에 들어가는 대출금 상환해야 되죠. 관리비 내야 되죠. 그 다음에 자동차 할부금 내고. 대부분 자동차 회사들은 직원들 싸게 할부로 해 주니까 보통 2~3년마다 한 번씩 차들을 바꾸거든요.

그게 엄청난 기득권이 돼버린 거예요. 그런 삶들이 굉장히 중요해져버린 거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한테는. 비정규직을 보면서 저 사람들하고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나는 저렇게 안 돼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조건이 그렇게 돼버린 거죠.

피어린 투쟁으로 정의를 획득했다. 획득된 정의의 수혜자이면서도 김진숙의 눈을 피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도 한때는 투쟁의 동료였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의 만장을 만들고 운구하기도 했던.

복수노조로 간 조합원들이 있거든요. 제가 어쩌다 한 번씩 회사 앞에 가잖아요. 그러면 굉장히 친했던 사람들인데도 곁에 못 와요. 시내에서 만나도, 일할 때 되게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고 되게 반가운데도 순간적으로 반가운 눈빛이 스쳐가는 데도, 그 다음 순간에는 사람이 냉담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쫓아가서 인사했어요. 자연스럽게 반말하던 아저씨가 말을 높였다, 내렸다 굉장히 부자연스러워지는 거지. 그럼 저 아저씨는 집에 가서 얼마나 힘들까. 마음이. 박창수부터 김주익, 곽재규, 자기네들이 운구하고 만장 들었던 사람들인데. 자기 선택이 얼마나 비굴했는지는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 그런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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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 있었고, 사람들은 뜨겁게 모여들었고, 끝내 승리했지만, 남은 일들이 있다. 분열, 배신, 상처. 세상은 짧은 시간 타올랐던 투쟁의 열기를 추억하지만, 남은 자들은 불탄 뒤에도 남은 것들을 껴안고 메마른 일상을 건너가야 한다.

그들도 피해자이다. 그들에게도 뜨거웠던 순간이 있었다. 평범한 인간에게 크고 무거운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노동의 숨통을 틔우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사람이 쉽게 선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녹색 정치’이다.

이제부터 정치 이야기다. 내가 선거에 나선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김진숙 선생의 기분이 어떠셨는지를 물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투쟁은 결국 정치 문제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 녹색당 출마한다는 이야기 듣고 속으로 막 박수쳤어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길을 가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를 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제 김진숙은 ‘국민승리 21’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녹색당을 말한다.

저는 민주노동당 전신인 ‘국민승리21’ 시절, 부산본부 노동위원장을 맡았거든요. 내가 생각해도 헌신적으로 일했어요. 이회창은 커다란 텔레비전 트럭에다 앰프 빵빵한 것 틀고 다녔는데, 우리는 ‘아 아 아~’ 하는 핸드마이크 들고 다녔어요. 괴정시장 가면 아지매들이 우리더러 빨갱이라고 한겨울에 생선 씻은 물을 뿌리고 그랬어요.

근데, 우리 고민은 시민들 만나면 ‘기호 4번 권영길입니다’. 외에는 할 수 있는 얘기가 없는 거였어요. 출근길 그 바쁜 사람들 붙잡고 “우리는 이런 강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거 정책은 이런 대안이 있습니다.” 이걸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한 마디 하면 사람들 다 지나가버리고, 듣는지 안 듣는지도 모르고. 사실 안 들리고, 핸드마이크로는.

목은 다 터져가지고 물도 못 삼킬 지경인데, 아파트 벽에다 대고 “시민여러분!” 이러면 시끄럽다고 욕하고. 그때 참 회의를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게임이 되겠나 싶은.

오랜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김진숙 선생은 정치의 관점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되돌려 놓는다. 내가 행복한 정치, 내가 살고 싶은 세상으로. 정치의 근원으로 회귀한 것이다.

부산녹색당 분들 만났을 때도 저는 ‘1%니 0%니 이런데 연연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내가 행복한 정치’를 하자는 거죠.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들을 세상에 펼쳐 보이는 것만 해도 얼마나 멋있는 일이에요. 나는 녹색당이 그것만 해도 굉장히 큰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녹색당의 강령을 읽고 녹색당으로 마음이 확 갔던 것은, “내가 살고 싶었던 세상, 내가 단 하루라도 살고 싶었던 세상을 녹색당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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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한 신뢰에요. 부산녹색당 윤미라 사무처장님, 장영식 선생님, 이 분들은 제가 크레인에 있을 때 매일 저녁 6시면 와 가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100배 서원을 하셨어요. 윤미라 처장님 같은 경우 고3짜리 애가 있었단 말이야. 근데도 매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나 와서 절하셨어요.

뭔가 뚫리는 것을 느낀다. 이런 것이 녹색 정치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나름 열심히 해 왔고 앞으로도 잘할 자신이 있다. ‘손가락’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연대, 거기서 쌓여가는 신뢰와 우정이 정치라면 녹색당은 확실히 희망이 있다.

저는 이런 분들이 하는 일이라면 불섶을 지고라도 같이 가고 싶어요. 그게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라고 보거든요. 저는 녹색당이 그러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랬다. 내가 이 선거에 왜 출마하게 되었을까. 밀양송전탑 투쟁을 하면서 깨달은 정치의 절박함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쭈뼛거리던 나를 확 잡아챈 것은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2013년 밀양송전탑 전문가 협의체 시절, 밀양 투쟁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때, 오래전부터 계획된 유럽 녹색당 순방 일정도 취소하고, 주민 측 위원으로 40일 동안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마지막 며칠은 아예 잠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보고서 마무리와 한전 측 위원들, 엔지니어들과 총성 없는 전쟁을 치렀다.

지방의회 의석조차 하나 없는 녹색당이 밀양 싸움에는 가장 열심히 연대했다. 전국사무처 활동가가 열 명도 안 된다. 대장정 시절, 홍군 부대처럼 일한다. 기자 한 사람도 오지 않을 기자회견을 밤을 새워 준비한다. 언론과 기성 정치권의 무시와 냉대는 이미 인이 박혔을 것이다. 바로, 그 녹색당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면서,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간다고 생각해요. 수십년 동안 무시당하는 조직도 있고, 사람들도 있으니깐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버티는 것만 해도 힘이에요.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가는 이게 우리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가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내가 <소금꽃나무>에서 제일 좋았던 대목은 김진숙의 동료들을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돈 만원이 생기면 짝짝이 신발을 신고 다니던 동지의 운동화를 먼저 사고, 천원이 남으면 순대 한 봉지에 젓가락 여덟 개가 꽂히던” 시절의 이야기 말이다.

찰나 같은 순간이 한 인간을, 영혼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해요. 제 기억 속 한진 조합원들은 1987년도 7월 25일에 멈추어 있어요. 넝마 같은 작업복을 입고 차를 막고 택시 위에 올라가서 마누라 하고 싸운 이야기 하고, 막걸리 외상값 이야기 하고, 집주인하고 싸운 이야기 하고, 아귀처럼 달려드는 ‘아새끼들’ 이야기 하던 그 순간으로 남아 있는 거예요.

제가 처음 한진 입사했을 때, 족장 위에서 사람이 떨어져서 뇌수까지 다 터져서 죽었는데, “어이구 또 하나 터졌네” 이러고 지나가는 거예요. 무슨 수박 터지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라구요.

같이 일하던 동료가 죽었는데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하나, 어떻게 저런 반응을 보이나. 근데, 내가 사고를 당해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구요. 저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저게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서 단 하루도, 10분도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1987년도 7월 25일은 한진중공업이 처음으로 파업을 하던 날이에요. 아저씨들이 난닝구 바람으로 모였어요. 조선소 땜쟁이들 난닝구는 진짜 웃기거든요. 다 빵꾸 나가지고, 그것도 쇳물이 들어가지고 벌거죽죽한 난닝구에 목은 다 늘어난거를 입고, 그 비를 맞으면서 ‘멸공의 횃불’ 부르고 ‘팔도 사나이’를 부르면서 파업을 한다고. 사오십대 남자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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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그 기억들이 이후의 제 삶을 지배해온 것 같아요. 그 억눌려있던 아저씨들, 대학 나온 스물 몇 살 기사한테도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쪼인트 까면 까는 대로, 그 새파란 경비들이 머리 길다고 깎으라면 이발소 가서 머리 깎고 들어오는. 그러던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파업 데모라는 걸 하는 거예요.

관리자들은 배 타고 도망가 버리고, 이만한 깡통에다가 물 담아 놓고 ‘신나’ 이렇게 써놓고. 저는 그 아저씨들이 다 기억할 거라고 생각해요. 복수노조로 간 아저씨들도 그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텨왔을 거라고, 그거는 절대 어디 안 갈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공유했던 30여년전, 그 하루의 기억. 저는 그걸 버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뭔가 ‘들어올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 무얼 덧붙이는 건 사족이다. 마지막으로, 녹색당원들에게 힘이 될 만한 ‘말씀’을 부탁했다

제가 11월달에 네팔을 갔다 왔거든요. 부산에는 ‘민들레 기금’ 이라는 게 있어서, 우리 본부 동지들 몇 사람이랑 같이 다녀왔는데. 네팔에 대해서, 전혀 모르다시피 하고 그냥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이 정도만 꿈꾸고 갔는데, 가서 굉장히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됐죠.

네팔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을 세우고 헌법을 국민 90% 지지로 새로 만들고, 여성 대통령이 선출되고, 국회의장도 여성이 되고, 그랬는데, 이웃 강대국인 인도가 네팔의 공화정 탄생을 못마땅해 해서 에너지 봉쇄 정책을 쓰고 있답니다. 기름이 없으니깐 거리가 다 주차장이더라구요. 가스가 없으니까 다 불 때서 밥 해 먹고.

근데도 제가 볼 때는 별 동요 없이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요. 네팔에서 3박4일 동안 트레킹을 하고 내려올 때 버스를 타고 왔어요. 움직이는 거 자체가 신기한 고물 버스가 문도 안 닫은 채로 달리는데, 저기 노인이 이렇게 뒷짐을 지고 가는데, 버스가 빵빵대도 안 비켜요. 아줌마도 안 비키고, 아이도 안 비키고. 차가 비켜야지 ‘왜 사람이 비키냐’는 거예요.

도로에서도 그래요. 차가 막 달려오는데도 안 비켜요. 뒤도 안 돌아봐요. 그 사람들은 저 차가 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거고, 그리고 당연히 사람이 먼저고 차가 비켜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 이치인 거예요.

우리는 GNP니, 평균 수명이니, 이런 걸로 판단해서 우리보다 돈을 못 버니깐, 저 사람들은 조금 무시해도 되는 거라 생각하잖아요. 공화정을 세웠다 그래도 그게 오죽하겠어, 지진까지 났다니 얼마나 사는 게 지지리궁상이겠어, 이러고 갔는데, 저는 그 나라가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변치 않는 묵묵함들, 끈기들. 묵묵히 뒷짐 지고 가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제게 깊이 들어왔어요. 우리 같으면 ‘영감쟁이가 뒈질라고 환장을 했나’ 이랬을 텐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어요. 결국은 차가 할아버지 뒤를 따라가게 되더군요. 우리는 너무 요동치는 데서 너무 오래도록 시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다들 짐작이 되실 것이다. 이제,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덧붙여주었다.

저는 오히려 녹색당 동지들한테 힘을 받아요. 진짜, 빛나지 않는, 알아주지 않는, 그거 다 알면서도 그 길 가고자 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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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크레인에서 309일만에 내려오던 2011년 11월 10일, 그 역사적인 승리의 순간, 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선생보다 먼저 내려온 것이 있었다. 작은 상자였다. 거기에는 그가 농성 100일부터 길러온 방울토마토와 상추, 치커리가 자라고 있었다. ‘고공 농업’이었다.

내 일생의 화두인 ‘노동’과 ‘농업’ 사이에는 김진숙의 ‘고공 농업’이 있었다.

언젠가 마음 편히 정당에 입당할 시기가 되면 반드시 녹색당에 입당하겠노라 했다던 김진숙, 세월이 흘러 일선에서 은퇴하면 녹색당에 가입하고, 텃밭을 가꾸고 있을 자신을 상상한다던 그 김진숙을 만났다.

김진숙은 ‘단 하루라도 살고 싶은 삶’을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풀빛 혁명가’였다.

(녹취·사진 남어진 당원/크레인 농성 당시 사진 제공: 장영식 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