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성명] 무엇을 위한 권력인가?

강원녹색당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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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권력인가?


풍천리 노인들에게 벌금과 노역을 명한 법원에 부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지난 20일 춘천지방법원은 홍천 풍천리 노인 7명에 총 1,800만 원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하는 약식명령을 송달하였다. 군청 퇴거명령에 불응하였다는 명목이다. 피고인에게 각각 2~300만 원의 벌금이 부과되었고, 납입하지 않는 경우 10만 원을 1일로 환산하여 노역장에 유치하겠다는 처분이 명시되어 있었다. 피고인은 대부분 80대 노인이다.

퇴거 불응은 7월 22일에 일어났다. 홍천군청 앞에는 양수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농성 천막이 있었다. 10여 명의 연로한 주민들이 지키고 있던 천막을 150여 명의 경찰과 100여 명의 공무원들이 둘러쌌다. 이들은 노인의 팔다리를 뒤틀면서 짐짝처럼 들고나갔다. 온몸에 멍이 들었고 핸드폰과 소지품을 빼앗겼다. 경찰서에 연행되었고 가족과의 면회는 차단되었다. 오후 늦게 석방되기까지 그날 벌어진 일들은 당사자 모두에게 공포였고 큰 상처였다.

왜 홍천군청 앞에 천막을 쳤을까? 풍천리에 양수발전소가 들어서면 한평생 평화롭게 살아온 집이, 마을이, 일터가 통째로 물에 잠기기 때문이다. 연행 일주일 전인 7월 15일 홍천군청에서는 토론회가 열렸다. 신영재 홍천군수와 한수원 소장이 함께한 자리에서 홍천군수가 거부한다면 발전소 건설 계획을 아무런 매몰비용 없이 백지화할 수 있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런 상황에서 풍천리 주민이 이 모든 일을 철회할 권한이 있는 홍천군청이 아니면 어디에 가야 할까? 이것이 과연, 돈에 눈이 먼 자들이 허구한 날 말하는 보상금 때문일까?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그 권력은 법에 기반한 공권력으로 행사되고 있다. 그 법은 퇴거불응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있고(형법 제319조), 여럿이 장기간 함께하는 경우 집단적, 상습적 폭력행위로 보아 가중처벌하고 있다(폭력행위처벌법 제2조). 그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어떠한 이유로 퇴거불응하게 되었는지, 왜 마을 주민들이 매주 군청 앞에서 집회를 하게 되었는지, 군청에 천막을 치고 들어가게 되었는지, 다 알면서도 모른척 한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집행하는 자들은 정작 국민이 부당한 피해를 입고 호소할 때 무관심하며, 되려 이들에게 공권력을 행사한다.

무엇을 위한 권력인가? 누구를 지키는 법인가? 작금의 홍천 상황은 지난 3일 시작된 우리나라 내란 사태와 맞닿아 있다. 대통령의 권한으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윤석열과, 군수의 권한으로 자기 주민의 목을 죄는 신영재는 다르지 않다. 이러한 때에 웃는 이들이 있다. 윤석열의 몰락으로 반사이익을 취하게 될 자들, 양수발전소 건설로 이득을 볼 자들이다. 낡은 법 구조 안에서, 허울뿐인 민주주의 안에서 단계적 합리적 변화를 외치며 실리를 취하는 자들과, 이러한 총체적 착취 시스템에 기생하는 자들이다. 지난 11월 미국 대선이 끝나고 환하게 웃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 앞에서 춤을 추던 일론 머스크의 웃기지도 않은 광경은 이러한 세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바꿔야 한다. 신영재가 다음 선거에서 낙선한다고, 윤석열이 감옥에 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 양수발전소를 지어 에너지 변동성에 대응한다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흡수량과 동일한 수준으로 맞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극소수만 자유롭지 않은 경제가, 기득권에 기생하지 않는 정치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하다. 그런 세상은 지식인들의 펜으로만 열리지 않는다. 여의도에 가득한 응원봉으로, 남태령을 넘는 트랙터로, 홍천군청 앞의 천막과 외침으로 열린다.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곳은 광장이다. 강원녹색당은 평화롭고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위해 광장에서 민중과 함께할 것이다.


2024년 12월 27일

강원녹색당